<방과 후 청춘 기록> 본문 샘플

 

 

상세 인포는 ▶ https://posty.pe/98tha0 

 

 

1. 포코 아 포코 青春

(전략)

 

“일단 양말이랑 신발부터 벗어.”

“응?”

“아, 얼른.”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시키는 대로 했다. 고작 두 시간 남짓 전에 처음 본 상대지만, 아키토의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갈하게 끈을 묶은 신발을 벗고 발목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벗은 뒤 곁눈질로 아키토를 확인하며 그처럼 바짓단을 조금 걷어 올렸다. 맨발바닥 위에 닿은 모래의 질감과 온도가 낯설어 자꾸만 발을 달싹이고 있자, 아키토는 말없이 토우야를 바다로 이끌었다. 물에 가까이 다가가자, 부드럽던 모래가 젖어 차갑고 축축했다. 반대로 벗은 발등 위는 쏟아지는 햇볕 덕에 뜨거웠는데, 불어오는 바람에 크게 일어난 파도가 그 위를 덮으며 차갑게 식히고 뒤로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뜨겁고, 차갑고, 다시 뜨겁다가 차갑기를 반복하는 기묘한 감각. 처음 겪어보는 감각에 겨우 익숙해지고 있을 무렵, 얼굴 언저리로 물이 튀었다. 입가를 스치고 지나간 바닷물이 짠맛을 냈다. 놀란 눈을 하고 돌아보면 아키토가 보기 좋게 웃고 있었다.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면 아키토는 제 뒷머리를 헝클였다.

 

“그냥, 뭐, 생각이 많아 보여서……. 기분 나빴으면 미안하고.”

 

아. 아무 말도 안 하면 오해할 수도 있겠네. 토우야는 마음속으로 허둥지둥 다음 할 말을 고르고 생각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해야 할 말과 행동들을 미리 고르고 재어둔 뒤 그대로 실행하는 일은, 왜인지 아키토를 대할 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고 싶지 않은 기분이기도 했고. 그래서 그냥, 길게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자신이 당한 것과 똑같이 아키토에게 바닷물을 튀겼다. 아키토는 조금 당황한 듯하더니 이내 크게 웃으며 두 손으로 물을 한가득 퍼 자신에게 거의 던지듯 굴었다. 이번에도 내키는 대로 아키토를 따라했다. 서로에게 물을 끼얹을 때마다 튀어오르는 물방울마다 햇빛이 잠시 어렸다가 흩어졌다.

 

휘청거리다 물에 빠진 아키토 덕에 유치한 싸움이 멎었다. 아키토를 일으켜준 토우야는 다시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너머가 문득 궁금해진다. 이곳에 온지 하루도 안 되어서 이미 겪어본 적도 없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버린 것만 같은데, 혹시 그 너머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가 준비되어 있을까. 호기심을 품는 순간 바로 옆에 있는데도 아키토의 얼굴이 지평선 위로 둥둥 떠올랐다. 그건 바람과 파도 사이로 섞여든 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듣기 좋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저 그 문은, 아무래도 자신의 힘으로 연 것이 아니었기에. 아키토가 이끌어주지 않았더면 열 수 없었던 문이기에.

 

“아키토랑 같이 보지 않으면 소용없을 것 같아.”

 

그냥 그런 예감이 들었어.

 

어느 샌가 붙잡고 있는 아키토의 손을 더욱 단단하게 맞잡았다. 부디 그 문을 함께 열어주었으면 해서. 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알 수 없는 고동에 잡아먹힌 가슴은 자전거로 내리막길을 달릴 때처럼 엉망진창 뛰어댔다.

 

“……나중에 피아노 치는 거 보여주면.”

“그런 게 보고 싶어?”

 

그 고동의 이름은 분명히 두근거림이었다.

 

(후략)

 

 

2. 부디 좋아한다고 말하게 해줘

(전략)

 

“토우야.”
“응?”
“나 오늘 고백 받았다?”
“……아아.”

……반응이 뭐 저래? 설마 농담하는 줄 아는 건가? 아키토는 거의 다 비워가는 아이스크림 속 치즈 케이크를 한 번 더 푹 떠서 입에 넣고는 오늘 교환한 라인 아이디의 프로필까지 보여주며 진짜임을 어필했다. 농담 아니고 진짜라니까. 강조에 강조를 더하자 토우야는 애초에 농담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며 태연하게 답했다. 조금 놀라거나, 그것도 아니면 당황하거나, 둘 다 아니라면 우리의 목표를 이루는 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훈계라도 할 줄 알았는데. (물론 마지막은 거의 0%겠지만) 그저 덤덤하게, 마치 오늘은 무슨 곡을 연습할지 정하자는 일상적인 말을 들은 것처럼 반응이 영 미지근했다. 토우야는 이런 데엔 영 관심이 없는 건가. 아키토는 수업 시간 내내 고민했을 때처럼 왼손으로 턱을 괸 채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지만, 토우야는 왜 그렇게 보냐는 듯 눈을 맞추는 것 말고는 그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여기저기서 고백을 받고 다니는 게 일상인 토우야라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궁금했는데….

뭐, 관심 없으면 어쩔 수 없지. 왠지 머쓱해진 기분으로 아이스크림을 한 번, 두 번, 그렇게 여섯 번 정도 퍼서 입에 넣을 즈음 토우야는 한참 전에 내려놓았던 수저를 들어 바닐라 아이스크림 귀퉁이를 조금 떠서 입에 넣었다. 아이스크림이 입술에 닿는 순간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토우야는 그제야 다른 단어로 입을 뗐다.

“아키토도 그 사람한테 관심 있어?”
“어? 나야, 뭐, 글…쎄? 아주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정쩡하게 답하고 있으면 토우야는 예의 그 미소를 보이더니 들고 있던 플라스틱 수저를 조심히 내려놓는다. 숟가락 위에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입술에 쓸린 흔적만 조금 남아 있었다. 질문은 저게 끝인가.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길어지는 정적과 간극을 이기지 못한 아키토가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다시 한번 입을 뗐을 무렵이다.

“아, 우리 반 애 말로는 말이야. 그 선배가,”
“아키토. 슬슬 가야하지 않을까? 약속했던 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아서.”
“어?”
“시라이시와 아즈사와가 기다릴 테니까. 아키토도 조금 전에 얘기했잖아?”
“어, 어. 그래. 그랬지….”

아키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토우야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지, 말을 돌린 것 같은데. 자신이 정리하겠다며 쟁반을 들고 일어서는 토우야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아키토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후략) 

 

 

3. 리와인디드 썸머

“결혼이요?”

실로 오랜만에 귀국한 참이다. 긴 비행 동안 쌓인 여독을 풀기도 전에 걸려 온 전화. 당장 만나자고 연락해오는 절친한 선배의 부름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근처 카페까지 불려 나왔다. 본래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타입의 사람이긴 했으나,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 모드를 끄자마자 전화가 쏟아지기에 끽해야 귀국 인사 정도 되겠거니 했더니, 이렇게 갑자기 청첩장을 건네받을 줄이야. ‘청첩장’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을 빤히 알면서도 아오야기 토우야는 저도 모르게 결혼하시는 거냐고 멍청하게 되묻고 말았다. 결혼이니 웨딩이니 하는 말이 가득 적힌 겉면을 보다가 멍하니 청첩장을 펼치자 남자가 여자의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청혼하는 모습이 입체적으로 튀어나왔다. 그 아래 적힌 ‘신랑’이라는 단어 옆에 선배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이 왜인지 낯설어 이름 위를 손가락 끝으로 조금 더듬어보고 있었다.

“토우야는 어때? 결혼 생각은 없는 건가?”
“네, 뭐……. 아직 결혼할 만한 나이는…….”
“흐음, 그런가? 토우야, 마지막 연애는?”
“…….”
“……설마, 첫 연애도 아직이냐!”
“아무래도…… ……네.”

유학생 입장에선 하루하루 사는 것만으로도 벅차 연애할 시간 같은 건 꿈도 못 꿨다고, 사실도 아닌 말로 에둘러 변명하려고 했는데.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선배에게는 그리 무겁지 않은 거짓말임에도 불구하고 영 내키지 않아서 결국 벌렸던 입을 다른 모양으로 바꾸어 수긍하는 답을 내놓았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다 비운 뒤에도 제법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선배는 토우야를 놔주었다. 데려다주겠다는 인사를 한사코 거절하고 저 스스로 귀갓길에 오르면, 꽤 늦은 시각임에도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에 발을 딛게 된다. 부모님의 손을 양손에 하나씩 꽉 잡은 채 걷는 아이,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손가락 하나하나 깍지를 낀 연인들. 기분 탓인지, 이 거리 위에 혼자인 사람은 마치 자신 하나인 것만 같았다. 토우야는 묘한 기분을 안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필이면 오늘은 달마저도 보름달이라, 빈틈없이 꽉 채워진 형상을 하고 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선배와 나눴던 대화를 다시금 되짚었다. 연애를 해본 적 없다는 게 그렇게 걱정할 만한 일인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연인들과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보면 그런 걱정을 산 이유에 대해 알 것도 같았지만, 그래도 잘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을 떠나서, 토우야는 여태껏 그것의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사랑을 이해할 수 없으니 결혼도 마찬가지였고.

‘네가 너무 어릴 때 유학을 가버려서 그래. 갑자기 언어도 문화도 다른 곳에 뚝 떨어졌으니, 당장 살아남는 거에만 신경 쓰느라 다른 건 다 뒷전이 됐을 거 아냐.’

집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 무렵, 문득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한 달도 안 되어 갑작스레 결정된 유학은 아무래도 토우야의 인생을 여러모로 바꿔버렸으니. 고작 고등학교 1학년의 몸으로 치열하게 버텨왔던 지난 시간이 자연스레 오버랩 되었다. ……지금 시간에 생각하기엔 다소 곤란한 일들이네. 토우야는 우울한 기억을 안은 채 잠들고 싶지는 않아 고개를 두어 번 가로저어 생각을 덜어냈다. 모로 돌아눕자 커튼을 쳐두지 않은 창문가로 달빛이 기어들어 오고 있었다.

‘여기서 고등학교 시절 보냈으면 좀 달랐을지도?’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꿈나라로의 여행 전까지 심심풀이는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옛날 생각이나 하는 것보다는 몇 배로 나았고. 그래, 상상만 해보는 거라면 나쁘지 않겠지. 고등학생으로 돌아가서, 이곳에서 학교에 다니게 된다면 어땠을까…….


* * *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눈을 떴다.

“다음 문장부터는 아오야기가 읽어봐라.”
“……네?”

다만 눈을 뜬 장소가 침대 위가 아니었을 뿐이다.

아오야기 토우야는 적잖이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도쿄에 있는 집의 아무도 없는 자신의 방에서 잠들었을 텐데. 눈을 뜬 곳은 이제 만 스물여섯이 된 자신에겐 하등 관계도 없는 교실이었고, 심지어 혼자도 아니었다. 교실 안에 있는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교복을 입은 채로. 토우야는 잠이 덜 깨 아직은 멍한 머리로 한참 생각한 후에야, 그들이 입고 있는 교복이 자신이 고작 한 달 다니고 떠나 버린 카미야마 고교의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뭐 해? 247페이지 여섯 번째 줄부터 읽으라니까.”
“아, 네, 네.”

눈앞에 놓인 것은 영어 교과서. 빼곡하게 이어진 문장들은 본래의 토우야가 읽고 쓰는 것에 비하면 훨씬 쉬운 수준이라, 눈과 입으로는 교과서 속 문장들을 따라가면서도 머리로는 다른 생각들을 차분히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분명 토우야의 기억 속엔 없는 장면이다. 그야, 토우야는 벚나무의 잎이 다 져버린 자리에 피어난 이파리들이 푸릇한 색을 입기도 전에 이미 이 나라를 떠났었으니까. 경험에도 없는 장면을 꿈으로 꾸다니, 내 상상력이 그렇게 좋았던가…. 헛웃음을 뱉을 뻔해서 순간 읽던 문장이 끊어질 뻔했다.

잠깐. 설마, 정말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와 버린 건가?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