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 LOVE> 본문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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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와 후배와 최악의 아침

(전략)

 

“시노노메 군. 오늘은 후배 데리고 가서 위로라도 해줘. 술 좀 사주고.”
“네? 제가요? 대리님이 하시면 되잖아요.”
“시노노메 군이 사수잖아.”
“……대리님, 제 사수일 땐 저한테 그렇게 안 해주셨잖아요.”
“어허. 이미 지난 일을.”

허. 기가 차서……. 아키토는 어이없다는 듯 대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그렇게 보고 있는다고 해서 뭔가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선배 말인데 싫다고 딱 잘라 말할 수도 없고……. 아키토는 결국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하, 그럼 그렇게 할까요. 울며 겨자 먹기로 수긍하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어두운 표정으로 가방을 챙기고 있는 토우야에게 다가가 어깨에 팔을 휙 둘렀다. 놀란 눈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아오야기 군, 퇴근이지?”
“아아, 네.”
“다른 일정 있어?”
“아뇨, 특별히 다른 일정은…….”
“그럼 술 마시러 갈래? 내가 살 테니까.”
“어……. 단둘이서 가는 건가요?”
“아, 혹시 둘이서 가는 건 좀 부담스러워? 그러면 대리님한테 말해서,”
“아뇨! 괜찮아요……. 둘이 좋아요. 둘이서만요.”

잘됐다, 이 기회에 대리님 억지로 끼워서 나한테 전부 떠넘긴 거 복수나 해야지…… 하고 생각했더니, 둘이 좋다고 두 번이나 강조해서 말하는 걸 보곤 입이 합 다물렸다. 아키토는 뺨이 조금 붉어진 토우야를 빤히 보다가 이내 웃어 보였다. 종일 썩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으면서 왜 이제야 얼굴을 붉히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본능이 그리 시켰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왠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어어, 그래. 그럼 가보자고…….

아키토는 회사에서 몇 정거장 떨어진 작은 이자카야로 토우야를 이끌었다. 회사 사람들은 잘 가지 않는 곳이라 편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평일 저녁인데도 사람이 꽤 북적거렸다.

“……그러니까 나한테 그렇게 미안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래도…… 제가 선배에게 매번 폐만 끼치는 것 같아서.”
“하아…. 후배는 원래 선배한테 폐 끼치고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 그리고 너 원래 전공도 이거 아니라며? 음악이랬나? 그런 애가 여기서 이 정도 구르는 거면 오히려 칭찬할 일이지.”

식사 겸 안주 몇 개를 시키고 술을 시켜 잔을 채워줬으나, 토우야는 마시라고 준 술을 마시지도 않고 술잔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이 그렇게 신경이 쓰이냐고 묻자 토우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토는 있는 영혼 없는 영혼을 전부 끌어모아 그를 달래며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키토의 손길이 닿자,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토우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키토와 시선을 맞추었다. 왜, 뭐야, 뭔데.

“저는…… 선배가 저한테 화나신 줄 알았어요.”
“하? 대체 어딜 봐서?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위로만 하고 있지 않나?”
“그게, 아까 프로젝트 중간보고서 얘기 나왔을 때…….”
“그거? 그러고 보니 너, 그때도 별로 안 좋아하더라? 야, 네 옆에서 내가 네 몫만큼 좋아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혹여나 부장이 태클을 걸까 조마조마하며 연신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있느라 어찌나 힘들었는지. 아직도 입매와 뺨이 경련하는 것만 같아서 아키토는 양손으로 제 뺨을 꾹 눌러 근육을 풀어주곤 앞에 있는 술잔을 들어 단번에 목 뒤로 넘겼다. 그 모습을 보며 여전히 잔을 만지작대던 토우야가 덤덤한 목소리로 까무러칠 소리를 했다.

“선배는 아무 칭찬도 안 해주셔서…….”
“풉, 뭐?”
“평소에는 제가 잘하면 잘했다고 꼬박꼬박 말해주시는데 오늘은 안 그러셔서, 화가 많이 나셨구나…… 했어요.”
“아니, 그…….”

그랬던가? 아키토는 저도 모르게 뿜어버린 술을 닦기 위해 티슈를 두어 장 뽑아다가 입가를 닦았다. 그간 ‘혼낼 때 혼내되, 잘했을 때는 혼낸 것보다 몇 배는 더 크게 칭찬을 해줘야 신입들이 금방 안 그만둔다’며 조언하는 선배들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해왔는데, 내가 오늘은 아무 칭찬도 안 했던가? 아키토는 머릿속에서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회의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부장님께 인사를 드리는데, 보고서 칭찬을 하셨고, 옆에서 꼭 형식적으로 감사하는 것처럼 굴어서 몇 배로 웃느라 진을 뺐고, 지쳐서 그대로 바람 쐬러 나갔……구나.

“……하, 정말 까다로운 후배가 들어왔네….”
“아아……. 그게, 저, 죄송……합니다?”
“뭘 또 여기서까지 죄송하다고 그래. 농담이야, 농담.”

왜 그런 데에 집착하는 거람. 집에서 칭찬을 못 받고 자랐나? 아니, 아니다. 아무래도 이건 또 너무 가버린 생각이지. 아키토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토우야의 부모님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 잔이 닳아 없어지도록 만지작대는 토우야의 머리를 헝클였다. 늘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는 머리가 엉망으로 뒤엉켰다. 평소 같으면 이 정도로 머리를 마구 헤집지는 않았을 텐데, 낮에 못 했던 것까지 플러스라는 느낌으로. 물론 그 이유 말고도, 술이 조금 과하게 들어간 탓도 어느 정도는 있겠지만.

“잘했어. 아오야기 군, 요즘 진짜 많이 좋아졌어.”
“그야…… 선배가 잘 가르쳐주셔서 그런 거예요.”
“하? 뭐야, 이제 제법 인사치레도 할 줄 아네.”

기특한지고……. 아키토는 토우야의 머리를 헝클이던 손을 내려 어깨동무하듯 어깨에 팔을 감고는 잔을 들었다. 그러지 말고 잔이나 들어. 제 손으로 다시금 가득 채운 잔을 토우야가 쥐고 있는 잔과 가볍게 맞부딪혔다. 짠, 하는 소리가 제법 맑게 울리자 토우야도 그제야 조금 얼굴을 펴곤 잔에 가득 담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술 잘 마시네. ……근데 얘 주량이 얼마나 되더라? 아키토는 비워진 술잔을 자연스럽게 다시 채워주는 토우야를 보며 기억을 더듬었으나,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신입사원 환영 회식 때는 하필이면 몸이 안 좋아서 집에 일찍 돌아갔었고, 그 외에는 토우야와 함께 술은커녕 밥조차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선배, 안 드세요?”
……뭐, 모르겠다. 일단 마시고 보자고.


***


아, 머리 아파.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가 억지로 잠을 깨웠다. 어질거리는 머리를 짚은 채 내내 감겨 있던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면, 이곳은 분명하게도 자신의 집이었다. 완전히 다 닫히지 않은 암막 커튼 틈으로 햇빛이 조금씩 들어오는 걸 보면, 시간은 아마도 아침. 모닝콜도 안 울렸는데 용케 깼네. 스스로에게 감탄하며 몸을 뒤척이는데, 뭔가 쎄한 기분이 들었다. 나 어제 집에 어떻게 온 거지? 내가 원래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쳐서 자던가? 왜 등 뒤에…… 벽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지……?

식은땀이 주르륵 흐를 만큼 긴장된 순간이었다. 아키토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등을 돌려 누웠다. 거기엔…….

“……아오야기 군?”

네가 왜 내 침대에서 자고 있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얼굴을 보는 순간 온몸의 피가 확 식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모르고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려 덮고 있는 토우야의 얼굴. 심지어 이불 밖으로 드러난 어깨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날것 그 자체였다. ……아냐, 아닐 거야.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닐 거야. 애써 부정하며 잠든 토우야에게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보고 있는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음은 굳이 누가 짚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직감과 동시에 흐릿하게 흐려졌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후략)

 

 

2. Wonderwall

(전략)

 

“밴드 공연 중입니다! 지금 들어오시면 칵테일 한 잔 무료!”

밴드 공연? 그 말에 솔깃한 토우야는 저도 모르게 라이브하우스로 발을 들였다. 중학교 2학년 주제에, 형의 재킷 속에 들어 있던 신분증을 들이밀고 칵테일 무료 교환권까지 받아서.

지하로 내려와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는 꽤 많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밴드 공연 때문인지, 아니면 칵테일 무료 교환권 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저 몸을 녹이기 위해 되는 대로 들어왔을 뿐인 토우야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최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가 자리를 잡고 앉은 토우야는 혹여나 누군가 말을 걸까 봐, 그래서 나이를 들킬까 봐 공연에 매우 집중한 척 가장하며 무대 위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시선만 두고 있었을 뿐, 생각은 온통 다른 것을 신경 쓰느라 목소리도 연주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절정으로 치달았던 곡이 끝나고 보컬을 비추고 있던 스포트라이트의 조명이 연해졌다가 무대 전체로 불이 들어오자 토우야는 눈을 잠시 찡그렸다가 떴다.

“오오. 평소보다 사람이 많은데?”

옆에 놓여 있던 생수병을 들어 목을 축인 보컬이 손등으로 입가를 문질러 닦으며 홀 안을 채운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인사말을 던졌다. 가장 앞줄에 앉은 관객과 사사로운 대화도 조금씩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아마 이곳에서 꽤 오래 공연한 듯 보였다. 여기선 유명한 밴드이려나.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나열하며 차갑게 얼었던 몸을 조금씩 녹이고 있으면, 이내 현실적인 생각이 토우야의 머릿속으로 찾아오게 된다. 집에는 언제 들어가지. 가서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럼 슬슬 마지막 곡인데, 간만에 애창곡 하나 부를까?”

때마침, 조명 아래에서 보컬의 주홍빛 머리가 빛났다. 가운데만 노랗게 물들인 건 이유가 있는 걸까? 시선이 가자 저도 모르게 생각해버린 일들에 오래 몰두하고 있을 틈도 없이 어쿠스틱 기타의 반주가 이어졌다. 보컬이 직접 연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타의 짧은 전주 후 그 위로 얹어지는 목소리. 토우야는 어느덧 다른 이유가 아닌 오직 그 노래를 위해 무대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내 묵직하게 울리는 드럼 비트가 얹어지자 토우야의 가슴도 덩달아 뛰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남들이 볼세라 몰래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 속에서 가장 앞줄까지 나온 후였다.

“All the roads we have to walk are winding, and all the lights that lead us there are blinding….”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음악을 해왔는데, 그게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음악의 전부라고 생각해왔는데, 아니었다. 자신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음악의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버지의 뜻대로 해온 음악에는 전혀 자유가 없었다는 것을. 정말 자유로운 음악이 여기 있었다는 것을.

“Because maybe you're gonna be the one that saves me.”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던 중 눈이 마주쳤다.

“And after all, you're my wonderwall…….”

이 사람이다. 이 사람뿐이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었지만,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만 들었다. 너만이 나를 구원해줄 단 한 사람이라는 가사가, 그의 목소리가, 그대로 날아와 토우야의 안에 깊게 박혔다. 곡이 모두 끝난 후에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리 큰 동작이나 소리는 아니었지만, 아주 분명하게.

“고맙습니다! 그럼 또 다음에 봐.”

관객들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어 인사하곤 기타를 챙겨 옆으로 빠지는 모습을 보던 토우야는 무대 아래에서 그를 따라 움직였다. 백스테이지도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작은 규모 덕에, 벽과 맞닿은 지점에 있는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앞을 막아서는 토우야 때문에 놀란 건지, 보컬은 순간 움찔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뭐야, 아키토. 아는 사람?”
“어? 아니…….”

이름이 아키토구나. 토우야는 눈을 반짝였다. 무언가 감상을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정련하는 사이에 그가 참지 못하고 제 앞에서 떠날세라 저기, 그게요, 그러니까, 하며 짧은 단어들로 겨우 붙들어놓고 있으면, 아키토는 팔짱을 낀 채로 대체 무슨 용건이냐는 듯 토우야를 빤히 보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크게 용건 없으면 나는 이만…….”
“저기, 첫눈에 반했어요…!”
“……하아?”

아키토는 한쪽 눈을 팍 찡그렸다. 소수이긴 해도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을 하고 있으니 이런 종류의 고백을 받는 일이 종종 있긴 했지만, 이런 타입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얘 남자 맞지…? 아키토는 저도 모르게 토우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볍게 훑었다. 혹시 어디 이상한 사람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한 번, 두 번, 그렇게 총 세 번을 자세하게 관찰한 후에야 아키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한 사람이긴커녕, 오히려 귀한 집 자제처럼 곱상한 외모에 단정하고, 앳된 얼굴이었다. 정말, 앳되어도 너무 한참이나 앳된 얼굴….

“……너 미성년자지?”
“네? 아, 그게…….”
“미성년자가 이런 데 들어오면 안 되지.”

마스터한테 이르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그냥 조용히 있다가 가. 술은 마시지 말고. 아키토는 부드러운 어조로 아이를 달래듯이 말하곤, 토우야의 손에 들려 있는 칵테일 무료 교환권을 슬쩍 빼내어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토우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키토 씨, 제가 아까 한 말은….”
“허어, 초면에 이름을 막 부르네.”
“아……. 죄송해요, 제 이름은 아오야기 토우야고요, 그러니까,”
“알겠어, 토우야 군. 그러니까…… 첫눈에 반했다…고?”
“……네.”

아키토는 곤란하다는 듯 제 머리를 긁적이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토우야 군, 이런 거 처음 봤지? 그러니까, 이런 공연 같은 거. 아마 그래서 그런 걸 거야. 그 나이엔 처음 접하는 일들엔 자주 그러잖아.”
“저는 그런 게 아니라,”
“조금 더 커보면 알게 될 거야. 다른 경험들이 많이 쌓이면, 아마 나나 오늘 들었던 노래 같은 건 기억도 안 날걸.”

아키토는 단정지어 말하곤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풀어 토우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착한 애처럼 보이니까, 이 정도 말하면 알아듣겠지. 대충 그런 심산이었다. 하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떨어지려던 손을 토우야가 확 낚아챈 덕분이었다.

“그럼, 어른이 된 이후에는요?”
“뭐?”
“어른이 된 이후에도 잊지 못한다면, 계속 이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제 얘기 들어주실래요?”

 

(후략)

 

 

3. 미필적 고의에 의한 랑데부

가능다하면 나는,

“시노노메 씨, 어때? 그 사람도 아직 날 사랑하는 걸까?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글쎄요……. 혼죠 씨 마음이 아직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거라면, 그 사람의 마음과는 별개로 한 번 정도는 더 도전해 봐도 좋지 않아요?”
“역시 그럴까? 그러면 나, 그이를 만나러 가볼게! 아, 늘 이런 진부한 연애 상담 들어주느라 고생이 많네…. 미안.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니까!”
“하하, 아니에요. 또 얼마든 상담해주세요.”

……사랑 같은 건 영원히 하고 싶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사교성은 좋았다. 심한 감정 기복을 훤히 드러내놓고 사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누나 덕분에 타인의 기분을 파악하는 일에 능했기에, 타인의 얼굴을 조금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략 파악할 수 있었고,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알 수 있었다. 친밀한 이에게 털어놓는 고민 상담이란 건 7할 정도는 사실 듣고 싶은 답을 정해놓고 마지막 확인 절차로 타인에게 확답을 듣고자 하는 것. 그러니 내가 고민 상담의 적격자가 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런 고민의 절반 정도는 보통 연애에 관련된 것이었다. 요즘 연락하는 사람이 있는데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냐는 것부터 시작해서 급기야는 애인과의 잠자리 회수가 줄었다느니 하는 것까지. 아무리 편하게 생각해도 그런 것까지 물어보나? 물론 듣고자 하는 답이 훤히 보였기에 상담이 그리 어려운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연애 상담에 능한 이미지가 되고 나니, 그런 말도 자주 듣게 됐다. ‘너는 연애 안 해?’, ‘너는 애인이랑 싸우지도 않겠다. 이렇게 능숙하잖아.’ 같은 말들. 그럴 때면 그냥 지금은 별로 생각이 없다고 하거나, 딱히 그렇지도 않다는 정도로 넘기곤 했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연애엔 그다지 흥미가 없다. 물론, 연애 경험 한 번도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뭐랄까, 조금 시들었다고 해야 하나. 그건 20대 후반이라는 나이와 내 정체성이 한몫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 결혼해.’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는데, 아마 그전에도 다소 애매하고 미묘한 전조 증상을 겪고 있었을 거다. 처음 깨달았을 때도 크게 충격받지 않았던 걸 보면, 아마도.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서도 크게 방황하거나 어려워하진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어느 정도 자신 있었던 것도 있다. 남자를 좋아하는 게 뭐 어때서. 요즘 그런 사람도 많다는데, 그중에 내가 사귈 사람 한 명이 없겠어, 설마.

‘결혼? 갑자기?’
‘이제 장난은 졸업해야지. 안 그래?’

사랑보다 단단한 결속은 없을 거라고 순진하게 믿던 시절이 내게도 있다는 게 지금으로선 꽤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아무튼, 그때는 그랬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아도, 어떻게 손가락질해도, 사랑한다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뭐든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장난이었어, 너는?’
‘진심인 쪽이 이상하잖아. 남자끼린데.’

타인의 상식선 바깥, 결혼이라는 제도권 안으로 들어설 수 없는 사랑은 너무도 위태로웠던 모양이다. 그 어떤 수단에도 굳건하게 뿌리를 내릴 수 없고 그저 완전히 다 알 수 없는 상대방의 마음에만 기대서 자랄 수 있으니까.

그날부로 나는 사랑을 포기했다. 버진로드를 따라 걷는 그의 모습을 그저 하객의 위치에서 바라보던 그 날. 난 더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잠깐 하루 어울려서 노는 정도면 됐어. 그 이상을 바라는 바보 같은 짓을 더는 하지 않아. 그런 마음을 숨긴 채 불멸의 사랑이라도 하는 듯, 마지막 남은 수단을 찾아 허우적대는 이들에게 영혼 하나 담기지 않는 손을 내밀어 마음에도 없는 도움의 손길을 자처하고 있었다. 기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무렵이었다.
아오야기 토우야를 만난 것은.

 

 

 

“어?”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매대에 남은 마지막 상품 하나를 동시에 두 사람이 집는 것은. 우리의 손이 동시에 닿은 것은 한 아티스트의 최신 앨범이었는데,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아티스트가 아니었으니, 그가 매장에 온 목적은 명백하게 그 앨범을 사겠다는 것 말고는 없었을 거다. 퇴근하는 회사원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뚫고 가게로 들어오자 마자 급하게 손을 뻗은 것을 보면, 분명. 나 역시 그런 목적으로 사람으로 가득 찬 거리를 뚫고 온 참이었고. 손이 닿은 상태로 멍하니 그와 눈을 마주하다가, 결국 내가 먼저 손을 뗐다. 명백하게 내 손이 밑에 깔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져가세요.”
“아, 저기, 제가 늦은 것 같은데…….”
“하하, 괜찮아요. 전 엄청 간절한 건 아니라서.”

사실 꽤 오래 기다린 음반이었지만, 동시에 앨범을 잡은 순간,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아주 짧은 찰나였으나 그의 얼굴 위로 스친 당혹감과 당황스러움을 읽어버렸기에 어쩔 수 없었다. 양보하자는 마음으로 손을 빼는 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앨범 한 장 정도는 없어도 내 일상에는 전혀 지장이 가지 않기도 했고, 무언가에 집착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내 안에서 커진 덕분이기도 했고. 물론, 간만에 이 근방에서 보기 드문 내 취향의 얼굴을 봤으니, 겸사겸사인 셈이었다.

“저, 혹시…… 시노노메 아키토 씨……? 맞나요?”

그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네? 어떻게 제 이름을…….”
“아, 역시 맞네요. 제가 음반 예약할 때마다 늘 제 이름 위에 계셔서…… 혹시나 했어요.”
“그걸…… 기억하세요?”
“정말 신기한 게, 늘 제 이름 바로 위에 계셨거든요. 어떤 아티스트이든 관계없이요. 취향도 비슷하고, 오는 시간도 비슷한가 봐요.”

그는 자기가 말하고도 신기하다는 듯 금방 웃어 보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얼굴을 보며, 차갑고 날카롭게 생긴 주제에 웃는 건 조금 귀여운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어떤 불순한 의도 하나 없는 얼굴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 나도 참…… 변하지 않는구나, 싶었다.

“그럼, 이것도 인연인데 연락처 교환이라도 하실래요?”
“예?”
“앨범 발매 정보라든가, 새로 발견한 노래라든가, 그런 거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물론 별로면 거절해도 돼요.”

왜 그런 제안을 꺼낸 건지 모르겠다. 잠깐 스쳐 지나간 인연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걸까? 사랑을 단념한 이후로 남자들, 특히나 제 취향에 부합하는 남자들과는 최대한 엮이지 않도록 주의했었는데도.

“좋아요.”

그는 라인 아이디를 교환하자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타인과의 사적인 교류를 멀리하게 된 주제에 스스럼없이 그에게 연락처 교환을 제안한 데에는, 그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한몫한 건지도 모른다. 상대는 분명 여자친구겠지. 만약 여자가 아니어도, 최소한 임자는 있다는 거고.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 물건 탐내본 적은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후략)